AD광고
AD광고5만원 이상 결제 시 (*배송비 제외)
정가제FREE(상품/사은품) 금액이 2,000원 이상이면 2,000원 추가적립
10만원 이상 결제 시 (*배송비 제외)
정가제FREE(상품/사은품) 금액이 2,000원 이상이면 2,000원 추가적립
정가제FREE(상품/사은품) 금액이 5,000원 이상이면 5,000원 추가적립
신용카드 무이자할부 안내
결제사 혜택 안내


배송안내
- 배송지역 선택
- 주소 검색
| 네이버페이 구매하기 | 찜하기 |
[네이버페이]
| ISBN | ISBN-13 : 9791176101042 |
|---|---|
| 쪽수 | 552쪽 |
| 크기 | 기타 규격 |
| 제품구성 | 단행본 |
- 인문/역사 > 서양철학
무한 경쟁과 효율 추구의 시대
우리의 노동은 누구의 것이 되었는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노동 멸시의 사상사를 딛고
노동 민주주의의 유토피아를 꿈꾸다
‘박홍규의 사상사’ 시리즈 세 번째 책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선보인다. 이 책은 동서고금의 사상가와 예술가 들이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했는지 통틀어 살피며,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노동이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찰한다.
노동의 사상사 전체를 볼 때 대체로 노동은 존중되거나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멸시당했다. 오늘날 우리가 위대한 철학자라 칭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노동을 ‘노예나 하는 일’이라 여겼다. 이후 막스 베버 등이 노동을 신에게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라 신성화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 역시 노동 그 자체의 가치와 그것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유익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르지만 이 책은 그러한 ‘노예의 노동관’을 거부한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이 유의미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고, 자신을 위해 노동하고 활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동은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자극함으로써 인간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노동 유토피아’를 추구해야 한다. 노동 멸시의 사상사를 알고 성찰해야 하는 이유 역시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노동에 대하여 새로운 상상을 해나가기 위함이다. 바로 ‘노동 민주주의’라는 이상이다. 그것은 곧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둘러싼 결정의 주체가 되는 일이다. 이 책은 “노동과 민주주의의 타락으로부터 노동자 개인의 독립성과 창조성, 책임의식을 지키기 위해” 쓰였다. 그리하여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들이 생산과 생산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배당하고 마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의 노동 사상사에는 타율적 노동과 억압되고 소외된 노동이 만연한 시대를 살면서도 자율적이고 해방적인 노동, 소외되지 않는 노동을 꿈꾼 이들이 있었다. 이 책은 그들, 즉 동양의 묵자와 도연명, 서양의 블레이크, 푸리에, 러스킨, 모리스, 졸라, 톨스토이, 러셀, 카뮈, 베유, 프롬, 일리치, 마르쿠제 등의 노동관에 공감하며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AI라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오늘날 노동의 미래는 희망적이리라 여겨졌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노동 부담을 경감하고, 반복적이고 불필요하며 비생산적인 노동 대신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노동에 종사하게 할 것이라 많은 이가 기대했다. 그러나 반도체 메가특구에 대하여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를 예외 적용하는 정책이 논의될 만큼 생산성 향상과 효율 추구를 위한 무한 경쟁이 극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노동 유토피아라는 이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노동이란 무엇인가』는 최초로 노동에 대한 동서양의 사상을 집대성하려 한 시도라는 의의를 지닌다. 특히 한평생 노동법을 연구하고 가르쳐온 학자이자 노동자로서 노동자와 함께 살고자 한 인간 박홍규의 노동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은 저작이다.
[목 차]
머리말
제1부 근대 이전의 노동관
1. ‘게을러서 침략당한 죄인’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2. 왜 이 책을 쓰는가?
3. 최초의 노동
4. 고대 동아시아의 노동관
5. 고대 서양의 노동관
6. 중세 동아시아의 노동관
7. 중세 서양의 노동관
제2부 근대 이후의 노동관
8. 근대 서양의 노예관
9. 근대 동아시아의 노예관
10. 근대 서양의 노동관
11. 19세기 서양 사상의 노동관
12. 19세기 서양 예술의 노동관
13. 19세기 서양 유토피아의 노동관
14. 20세기 서양 파시즘의 노동관
15. 20세기 서양 사상의 노동관
16. 20세기 서양 예술의 노동관
17. 기본소득
맺음말
미주
[본 문]
인류 사상사에서 그런 유토피아를 추구한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그들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우리의 빈약한 사상계에 참된 노동 민주주의의 사상을 더하여 모두의 삶이 즐겁게 꽃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극단에 치달은 경쟁으로 인해 노동이 나에게서 분리되고 나로부터 소외되어 극소수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한 사치가 되는 현실을 이제는 극복해야 합니다. 그처럼 소외된 노동은 인간 고유의 능동성과 창조성을 죽이고, 체념과 무책임에 젖은 인간만을 양산합니다. 그로써 민주주의의 실질적 실패를 초래하고 결국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를 결과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비통한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_「머리말」에서
과연 인간을 ‘단군 이래 나태했던 한민족이 박정희에 의해 갑자기 근면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도 되는 걸까요? 정말로 근면해졌다 해도 독재에 의해 강요된 것은 아닐까요? 히틀러에 의해 독일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경제를 부흥하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것과 박정희의 독재에 의한 경제개발이 뭐가 다를까요? 모두 독재에 의한 강제 동원이 아니었을까요? _「5·16 쿠데타와 노동」에서
그들이 보기에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반국가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반도덕적이고 반인간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인 품성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즉 실업이 사회경제적 이유나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족성이나 개인의 인격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국민의 자격이나 능력을 국가적 복지가 아니라 개인적 고용의 차원에서 판단하는 관점입니다. 게을러서 취직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은 뒤에서 볼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에 나오는 노동 및 노동조합에 대한 우익적 관점과 같습니다. 그 뿌리는 노예를 선천적 존재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에게 있습니다. 예외는 디오게네스, 블레이크, 톨스토이, 모리스, 졸라 등에 불과합니다. _「보수 우익의 노동관」에서
노동이란 인류의 반 이상을 차지한 노예나 농노가 하는 짓이라는 노동관이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되어 인류 역사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 노예는 대부분 외국인이었기에 외국인 혐오라는 인종차별과도 결부되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반도에서는 외국인이 아니라 동족을 노예로 부렸으니 인종차별이라는 것만큼은 없었다고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소위 선진국처럼 조금 잘살게 되면서 당장 외국인 노동자들이 밀려와 최하위 노동자 계층을 형성했고, 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_「지금은 노동자 시대입니다」에서
노동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크게는 남을 위한 노동과 자신을 위한 노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대의 노예나 중세의 농노가 하는 노동은 대부분 남을 위한 노동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위한 노동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근대 이후 노동자는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사용자를 위한 노동 외에 자신을 위한 노동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노동 외에도 노동자의 자율적인 활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노동자 스스로 즐겁거나 관심이 있어서 선택하는 자기 주도적인 활동을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남을 위한 노동이 노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서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노동을 무의미하고 천박한 것으로 보고, 노예나 할 짓이라고 경멸했습니다. 지금도 소위 3D 업종이라며 경멸당하는 노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 어떤 노동도 인간이 하는 이상 경멸당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살인을 위시한 반인간적인 범죄행위를 노동으로 수행하는 경우는 예외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외에는 어떤 이유에서도 노동을 멸시할 수 없습니다. _「노동」에서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 1842~1911)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le droit à la paresse』(1883)에 나오는 말입니다. 여기서 라파르그는 “노동에 대한 사랑”을 “기이한 망상”에 사로잡힌 “정신적 일탈”이라고 비판하면서 성직자나 학자 등이 그것을 조장했다고 비난합니다. 뒤에서 보듯이 루터나 칼뱅 등의 성직자들이 노동을 신성하다고 예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을 완전히 멸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노동이 신성하다고 예찬할 생각은 없지만, 무의미하다고 멸시할 생각도 없습니다. 물론 무의미한 노동도 있을 수 있지만, 유의미한 노동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이 유의미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고, 자신을 위해 노동하고 활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노력이지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아닙니다. _「노동」에서
국내외 철학자들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동에 대한 정의를 다루면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을 포함하는 ‘활동’을 언급하는 사례가 자주 있음을 주의하여야 합니다. 심지어 활동 영역의 구분을 노동 분업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 자본주의의 분업을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것은 활동이나 직업의 분화에 불과하며 노동 분업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최초의 노동 분업 이론가라고 함은 잘못된 것입니다. _「labor와 work」에서
존엄한 삶의 핵심은 존엄한 노동, 즉 ‘존엄 노동’입니다. 본래 노동은 스스로 어떤 목표로 향하는 자발적인 노력이기에 존엄하고, 노동을 하면서는 그 속에 몰입하기에 존엄하고, 목표를 달성하여 노동을 마칠 때에는 성취감이 있기에 존엄합니다. 그리고 그 존엄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자유입니다. 스스로 노동을 선택할 때 자유를 느끼고, 노동하면서 자유를 느끼고, 노동을 끝내면서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자유롭고 존엄한 노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은 그렇지 못합니다. _「나는 자연인이다」에서
세상에서 가장 원시적인 사람들은 소유물이 거의 없었지만, 결코 가난하지는 않았습니다. 빈곤은 문명의 발명품이며 계급 간의 대조로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이 자유롭다면 어떨까요? 훨씬 나중에 인류를 장악한 물질주의적 가치와 비교하여 더 자유롭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노동, 여가 및 문명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의심과 추가로 사고할 여지를 남깁니다. _「자연인은 가난했다?」에서
『논어(論語)』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四書)의 하나입니다. 공자는 유가의 시조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어려서 여러 가지 노동을 익혀 다재다능했으나, 자신은 그 점을 싫어했습니다. 천하기 때문에 다재다능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체제가 공인하는 예나 음악 외의 능력을 부정하고 예를 사회적 귀천 서열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노동을 멸시했습니다. _「『논어』」에서
묵자는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도 노동을 경시하면 망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유가의 허례허식이 백성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유교의 예를 맹렬히 비판하였습니다. 공자를 포함한 사상가들이 대부분 통치자가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묵자는 통치자도 백성처럼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관습화한 예를 비판했습니다. 묵자는 인간적인 친소나 용모의 미추, 부귀 및 빈천을 따지지 말고 오직 능력에 따라서 각자에게 적합한 직분이 주어져야 하고, 직분은 노동의 성과에 따라 재조정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_「『묵자』」에서
시시포스의 형벌은 보통 ‘의미 없는 반복 노동’을 뜻하지만,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에서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카뮈는 시시포스를 통해서 자신의 부조리 문학을 말하는데, 끝없는 형벌 속에서 혼자만의 싸움을 하게 된 시시포스는 자신이 신에게 반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더 이상 무의미함을 의식하지 않고 무한한 반복을 즐기는 것임을 알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_「고대 그리스의 노동관」에서
세네카는 노예에 대한 체벌과 성적 착취와 같이 특히 굴욕적인 행동에 반대했지만, 노예를 두는 전체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노예에 대한 대우가 좋아야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문을 받을 때 침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 모두가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노예를 잘 대우하라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_「스토아학파의 노동관」에서
오언은 국가가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노동권의 선구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가지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줄 뿐인 자선이 억압될 수 있고, 자선을 제한함으로써 가장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성직자의 권력이 약화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생시몽과 같은 유토피아주의자들처럼 오언은 바람직하지 않은 활동과 제도들을 비판했습니다. 사제, 변호사, 치안판사, 군인, 정치인, 공증인 등을 기생충들이라고 비난하고, 종교, 법률, 결혼, 사유재산 등을 비판했습니다. _「오언의 노동관」에서
아나키즘의 시조라고도 하는 영국의 윌리엄 고드윈에게 노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의 필수적인 기능이었고, 그의 이상은 기술과 공동생활을 통해 노동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구상한 아나키 사회에서 개인은 두려움이나 강압 때문이 아니라, 지역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필요한 작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고드윈은 자신의 비전을 당시의 억압적인 시스템과 대조했는데, 그는 그 시스템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족스럽지 못한 노동에 몰아넣는다고 비판했습니다. _「윌리엄 고드윈의 노동관」에서
톨스토이는 스스로 구두 수선이나 풀베기, 비료 운반, 집짓기 같은 육체노동을 즐겨 한 작가로 유명합니다. 노동이 소설의 주제가 되는 것은 주로 19세기에 와서이지만 톨스토이처럼 직접 노동을 한 작가는 모리스를 제외하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는 모리스가 말하는 노동의 기쁨을 넘어 노동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찾아낸 첫째 가르침은 “네 이마의 땀으로 빵을 먹으라”라는 것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빵을 위한 노동, 즉 생존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은 인류를 구원할 치유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유용한 노동을 다해야 행복할 수 있고, 그런 노동이 정신적 구원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_「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노동관
」에서
모리스는 19세기 자본주의하에서 기계 발전이 낳은 생산력의 증대는 인간의 노동 강도를 더욱 심화했으며, 자본의 논리에 따라 제국주의의 팽창 욕구가 더욱 확대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즉 노동을 싸게 만들려는 모든 고안은 단지 노동의 부담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고, ‘세계 시장’에 대한 탐욕은 먹은 양에 따라 커져가며, 문명(다시 말해 조직화된 비참함)의 범위 안에 있는 나라들은 시장의 쓰레기 덩어리로 배가 불러 그 울타리 밖의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폭력과 사기를 무자비하게 사용하였다고 비판했습니다. _「윌리엄 모리스의 사회 비판」에서
나는 테일러주의가 본질적으로 파시즘이며, 무자비한 노동 강화 그리고 직업 개념과 실행 사이의 엄격한 분리를 통해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포섭을 보장한다는 해리 브레이버먼(Harry Braverman, 1920~1976)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브레이버먼은 『노동과 독점 자본: 20세기 노동의 퇴화(Labor and Monopoly Capital: The Degradation of Work in the Twentieth Century)』에서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브레이버먼만이 아니라,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나 하워드 진과 같은 사람들도 테일러주의를 ‘광적인 반노동이자 끈질기게 친기업적인 것’으로 봅니다. _「테일러의 노동관」에서
독일노동전선의 목표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독일인의 진정 사회적이고 생산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며 ‘모든 개인이 최대한의 일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임금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노동 수탁자들은 실제로는 고용주의 뜻을 따랐고 노동자들과는 상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시간당 임금을 동일하게 유지해야 하며 노동자는 생산성 향상을 통해서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임금을 낮게 유지하라는 명령도 내려졌습니다. 독일은 1930년대 내내 경제 회복을 경험하고 고용이 크게 증가했지만, 임금은 대공황 당시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낮았습니다. 독일노동전선은 1939년까지 3만 5천 명 이상의 정규직 직원을 자랑하는 가장 큰 나치 조직 중 하나였습니다. _「독일노동전선」에서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은 더 이상 자아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의 창의력에 대해 낯선 사람처럼 느낍니다. 그들은 여가 시간에만 ‘집에 있다’고 느끼고 직장에 있을 때는 스스로를 ‘노숙자’처럼 느낍니다. _「에리히 프롬의 노동관」에서
이러한 기본소득이 구상된 이유는, 종래 사회보장제도의 전제였던 노동과 가족의 구조, 즉 완전고용하에서 남성이 정규직으로 노동하여 임금을 받고, 전업주부인 여성이 가정에서 무상 노동을 한다는 구조가 붕괴되고 있으며, 특히 기업 중심 사회에서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또한 이를 한국에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최근 한국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강고한 성별 분업에 근거하여, 기업과 가족이 낮은 사회보장제도의 수준을 보완함으로써 더욱더 강고한 기업 중심의 사회경제 시스템이 형성되어왔으나, 앞으로 개인의 자립과 공동에 근거한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업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_「기본소득의 의의」에서
헌법상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최근 두 가지 차원에서 특히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격차와 빈곤의 심각화입니다. 이는 신자유주의하의 규제 완화에 의한 복지국가의 기능 파괴에 의해 초래된 부분과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세계경제 변화에 의한 복지국가의 기능 불능에 의해 초래되는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후자의 기능 불능은 먼저 국가가 완전고용을 보장할 수 없게 되어 복지국가의 전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래의 실업수당과 같은 단순하고 수동적인 수단이 아니라, 노동력의 질을 높이고 노동력 이동을 지원하며, 복지 급부를 노동에 연동시키면서 노동 인센티브를 높이기 위한 글로벌리제이션이 진행되는 가운데 취로와 복지를 결합하는 정책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정책의 모색은 필지의 요청이지만, 그것이 종래 산업화 정책의 연장이어서는 많은 문제를 낳기 마련이라는 점도 앞에서 지적한 대로고, 따라서 자연 생태와의 조화를 비롯한 여러 가치와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조화 속에서 노동과 복지를 결합하는 기본소득 제도의 한국적 발전이 요망됩니다. _「사회적 배제 및 워크페어 정책과 기본소득」에서
특히 디지털 시대의 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과거 어느 때보다 잔혹하게 짓밟습니다. 휴대용 디지털 기계는 노동자로 하여금 휴일 없이 24시간, 1년 내내 어디서든 업무를 처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휴식이란 없습니다. 게다가 경쟁에 뒤지면 해고된다는 공포에 젖는 노동자는 죄수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경제성장이라는 목표와 함께 진행됩니다. 그러나 재화와 서비스의 산출량을 매년 몇 퍼센트씩 올린다는 것의 결말은 파멸일 뿐임이 명약관화합니다. 빈민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세계적인 기후 위기를 벗어나려면 경제성장을 멈추고 노동 외의 활동, 한가한 휴식, 결근, 태만을 크게 늘려 긍정적인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고,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합니다. _「맺음말」에서
무한 경쟁과 효율 추구의 시대
우리의 노동은 누구의 것이 되었는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노동 멸시의 사상사를 딛고
노동 민주주의의 유토피아를 꿈꾸다
‘박홍규의 사상사’ 시리즈 세 번째 책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선보인다. 이 책은 동서고금의 사상가와 예술가 들이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했는지 통틀어 살피며,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노동이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찰한다.
노동의 사상사 전체를 볼 때 대체로 노동은 존중되거나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멸시당했다. 오늘날 우리가 위대한 철학자라 칭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노동을 ‘노예나 하는 일’이라 여겼다. 이후 막스 베버 등이 노동을 신에게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라 신성화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 역시 노동 그 자체의 가치와 그것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유익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르지만 이 책은 그러한 ‘노예의 노동관’을 거부한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이 유의미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고, 자신을 위해 노동하고 활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동은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자극함으로써 인간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노동 유토피아’를 추구해야 한다. 노동 멸시의 사상사를 알고 성찰해야 하는 이유 역시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노동에 대하여 새로운 상상을 해나가기 위함이다. 바로 ‘노동 민주주의’라는 이상이다. 그것은 곧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둘러싼 결정의 주체가 되는 일이다. 이 책은 “노동과 민주주의의 타락으로부터 노동자 개인의 독립성과 창조성, 책임의식을 지키기 위해” 쓰였다. 그리하여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들이 생산과 생산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배당하고 마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의 노동 사상사에는 타율적 노동과 억압되고 소외된 노동이 만연한 시대를 살면서도 자율적이고 해방적인 노동, 소외되지 않는 노동을 꿈꾼 이들이 있었다. 이 책은 그들, 즉 동양의 묵자와 도연명, 서양의 블레이크, 푸리에, 러스킨, 모리스, 졸라, 톨스토이, 러셀, 카뮈, 베유, 프롬, 일리치, 마르쿠제 등의 노동관에 공감하며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AI라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오늘날 노동의 미래는 희망적이리라 여겨졌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노동 부담을 경감하고, 반복적이고 불필요하며 비생산적인 노동 대신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노동에 종사하게 할 것이라 많은 이가 기대했다. 그러나 반도체 메가특구에 대하여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를 예외 적용하는 정책이 논의될 만큼 생산성 향상과 효율 추구를 위한 무한 경쟁이 극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노동 유토피아라는 이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노동이란 무엇인가』는 최초로 노동에 대한 동서양의 사상을 집대성하려 한 시도라는 의의를 지닌다. 특히 한평생 노동법을 연구하고 가르쳐온 학자이자 노동자로서 노동자와 함께 살고자 한 인간 박홍규의 노동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은 저작이다.
뿌리 깊은 노동 멸시 사상과
봉건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파시즘의 노동관을 고발한다
노동 사상사의 한 켠에서 그들이 꿈꾸었던
노동 유토피아를 찾아서
총 두 개의 부로 이루어지는 이 책은 1부와 2부에서 각각 근대 이전과 이후의 노동관을 다룬다. 1부의 1장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고 하는’ 일제강점기부터 뿌리 깊은 한국인의 그릇된 노동관을 비판한다. 이어 2장에서는 노동의 의미를 고찰하고, 이후 3장부터 7장까지는 주로 중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와 서양의 근대 이전 노동관을 검토한다.
2부에서는 16~19세기의 노동관과 20세기의 노동관을 각각 다룬다. 노동의 사상사는 크게 해방적 노동과 억압적 노동이라는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억압적 노동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기로부터 시작되어 칼라일을 거쳐 20세기의 테일러 시스템, 윙어와 히틀러 파시즘, 1930~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강제 동원, 소련이나 중국, 북한 등 공산주의 체제까지” 이른다. 특히 14장에서 다루는 파시즘의 노동관은 나치의 강제수용소 앞에 붙어 있던 “노동은 자유롭게 한다(Arbeit macht frei)”라는 말로 대표된다.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오늘까지에 이르는 한국인의 노동관에 대응하는 것이며,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 보장을 내용으로 하는 유토피아적 탈노동을 주장하는 20세기 서양의 노동관과는 반대된다. 20세기 서양 노동관의 “핵심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 그들의 일상인 모든 직업과 노동은 자유롭고 평등해야 한다는 이상”이다. “구체적으로 노동시간은 짧을수록 좋고, 임금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할 정도의 기본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노동관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주 4일, 하루 4시간 정도만 노동하면 충분하다는 지금 사람들이 듣기로서는 다소 파격적이라 할 만한 주장을 펼친다. 물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적정한 임금과 노동환경이 보장된다는 조건하에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본소득과 생태적 직업 환경이다. 이 책의 마지막 17장에서는 노동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자 조건으로서의 기본소득을 비중 있게 다룬다. 기본소득의 역사와 그것에 대한 진보와 보수, 중도 진영의 다양한 주장, 전 세계의 기본소득 시행 현황 등에 대해 검토한다. 여러 가치와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노동과 복지를 결합하는 기본소득 제도의 한국적 발전이 요망”된다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저술가이자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이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시골에서 아내와 함께 작은 농사를 지으며 자유·자연·자치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오사카시립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오사카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하버드로스쿨, 노팅엄대학, 프랑크푸르트대학 등에서 연구했다.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2015년 『독서독인』으로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우정이란 무엇인가』(2025 세종도서 교양 부문) 『노년이란 무엇인가』 『간디 평전』 『유일자와 그의 소유』 『오월의 영원한 청년 미하일 바쿠닌』(2023 경기도 우수출판물 제작지원 선정) 『밀레니얼을 위한 사회적 아나키스트 이야기』(2022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창작지원사업 선정) 『카뮈와 함께 프란츠 파농 읽기』(2022 세종도서 교양 부문) 『표트르 크로포트킨 평전』(2021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창작지원사업 선정) 『비주류의 이의신청』(2021 우수출판콘텐츠 선정) 『내 친구 톨스토이』 『불편한 인권』(2018 세종도서 교양 부문) 『인문학의 거짓말』 『놈 촘스키』 『아나키즘 이야기』 외 다수의 책을 집필했으며, 『오리엔탈리즘』 『간디 자서전』 『유한계급론』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 반품/교환방법 |
|
|---|---|
| 반품/교환 가능기간 |
|
| 반품/교환비용 |
|
| 반품/교환 불가 사유 |
|
| 상품 품절 |
|
| 소비자 피해보상 환불지연에 따른 배상 |
|

- [이벤트 당첨자 발표] 26년 8월 <이달의 작가> 댓글 이벤트 당첨자 안내
- [공지사항] 폭우로 인한 거제·통영 지역 배송불가 안내 ('26년 8월 19일 09시 30분 기준)
- [공지사항] 2026년 08월 27일 위탁업체 추가에 따른 개인정보처리방침 개정
- [공지사항] [인터넷 영풍문고] 2026년 '택배 없는 날' 배송 일정 안내
- [이벤트 당첨자 발표] 7월 모두의 서가 이벤트 당첨자 판매금액 리워드 안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