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프롤로그 | 민주시민교육은 어디서 길을 잃었나
첫 번째 질문
시민성은 어떻게 ‘인성’이 되었는가
세월호 참사 이후 제정된 ‘인성교육진흥법’
인성과 시민성은 어떻게 다른가
한국 교육은 왜 인성으로 돌아오는가
인성교육이 가르치지 않는 것
시민은 어디에서 자라는가
두 번째 질문
시민성은 어떻게 ‘역량’이 되었는가
교육이 서비스가 된 날
고시생이 된 아이들
‘문제 없는 아이’라는 이상형
역량 목록으로 관리되는 시민성
경쟁의 교실에서 연대는 어떻게 지워지는가
측정하지 않는다는 결정
세 번째 질문
세계시민교육은 누구를 위한 우회로인가
‘민주시민’ 대신 ‘세계시민’이 선택된 까닭
누구를 위한 우회로인가
이주배경 어린이와 영유아는 어디에 있는가
선의에서 분석으로
가까운 불의를 다룰 자유
어린이를 시민으로 다시 부르기
네 번째 질문
시민성은 어떻게 ‘인성’이 되었는가
교실의 침묵은 어디에서 자랐는가
교사를 침묵하게 만드는 네 가지 통로
침묵하는 교실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교사의 침묵에서 학생의 침묵으로
묵인에서 직시로, 침묵에서 교육으로
다섯 번째 질문
교육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왜 부정하는가
‘중립’은 권리인가 의무인가
양 진영의 ‘중립’ 경쟁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부정에서 인정으로
민주주의가 교실에 닿으려면
여섯 번째 질문
돌봄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광장의 시민은 누구의 노동 위에 서 있는가
마샬의 시민권이 놓친 것
‘돌보는 시민’이라는 네 번째 유형
배려와 돌봄은 같은 말이 아니다
돌봄의 위계가 만든 교실
영유아교육 노동의 여성화가 침식하는 민주주의
“교육은 돌봄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돌봄이 시작되는 곳에서 시민이 자란다
일곱 번째 질문
기후위기와 AI의 시대,
교실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AI 교과서 후퇴가 묻는것
알고리즘은 아이들의 일상을 어떻게 잠식했는가
어린이는 시민으로 응답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들은 왜 헌법재판소로 갔는가
다음 30년, 결정권한이 어디에 놓이는가
에필로그|아이들이 ‘삶을 사랑하는 시민’으로 자라려면
참고문헌
[본 문]
인성교육은 좋은 사람을 기를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은 다르다. 좋은 사람일지라도 부당한 구조 앞에서 침묵할 수 있다. 좋은 시민은 그 침묵을 깨는 사람이다. 한국 교육은 좋은 사람을 기르는 일에는 익숙하고, 좋은 시민을 기르는 일에는 서툴다. (...)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우리는 역시나 ‘시민’이 아니라 ‘착한 아이’를 기르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 안에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질문이 들어 있다. _ 첫 번째 질문(시민성은 어떻게 ‘인성’이 되었는가) 가운데
배려는 가르치되 권리는 가르치지 않는 사회, 존중은 말하되 차별은 말하지 않는 교실, 이 구조 안에서 인성교육은 가림막 역할을 한다. ‘우리는 배려를 가르치고 있다’는 위안, ‘우리는 존중을 가르치고 있다’는 자기 인증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동안 법은 만들어지지 않고, 차별은 구조적으로 지속된다. _ 첫 번째 질문(시민성은 어떻게 ‘인성’이 되었는가) 가운데
5·31을 떠받친 핵심 기조는 ‘열린교육 체제, 수요자 중심 교육, 자율성, 다양화 및 특성화, 정보화’, 이 다섯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이 가운데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을 가장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두 번째 ‘수요자 중심 교육’이다. 이 한 구절이 한국 교육의 문법을 통째로 다시 썼다. 그렇게 학생과 학부모는 수요자가 되고, 학교와 교사는 공급자가 되고, 교육은 그 둘 사이에서 거래되는 서비스가 되었다. _ 두 번째 질문(시민성은 어떻게 ‘역량’이 되었는가) 가운데
역량은 관리 가능한, 다시 말해 측정할 수 있고, 비교할 수 있고, 순위를 매길 수 있는 시민성을 만든다. 그러나 시민성의 핵심은 관리 불가능한 자리에 있다. 부당한 것 앞에서 멈추는 감각, 옆 사람의 고통에 응답하는 감각, 기존 질서에 물음을 던지는 감각, 이것은 측정할 수 없다. 측정하려는 순간 그 감각 자체가 변질된다. _ 두 번째 질문(시민성은 어떻게 ‘역량’이 되었는가) 가운데
한국의 교실에는 두 개의 모습이 겹쳐 있다. 하나는 순응의 교실이다. 아이들이 침묵하고 정답을 외우고 어른의 기대에 맞추는 교실, 다른 하나는 경쟁의 교실이다. 아이들이 침묵하지 않는다. 발표하고 질문하고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가 ‘나의 역량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로 정렬된 교실이다. 두 교실은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만 같은 토양에서 자란다. 한쪽은 입을 다물게 하고, 다른 한쪽은 입은 열되 혼자 말하게 한다. _ 두 번째 질문(시민성은 어떻게 ‘역량’이 되었는가) 가운데
한국 사회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해 동전을 모으는 마음은 길러왔지만 학교 담장 바로 밖의 가난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마음은 기르지 않았다. 모의 유엔에서 난민 문제를 토론하는 학생은 길러왔지만 같은 교실에서 누가 겉돌고 있는지, 왜 그런지를 묻는 학생은 기르지 않았다. _ 세 번째 질문(세계시민교육은 누구를 위한 우회로인가) 가운데
침묵하는 교실에서 어린이는 침묵 자체를 배운다. 불편한 것은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 다른 의견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 어른이 정한 것에 따르는 쪽이 편하다는 것, 왜냐고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야 칭찬받는다는 것을 배운다. 이것이 숨겨진 교육과정이다. 교실의 구조, 규칙의 작동 방식, 교사와 학생 사이의 권력 관계, 어떤 질문이 허용되고 어떤 질문이 막히는지가 모두 ‘숨겨진 교육과정’을 이룬다. 공식 교육과정에는 “시민의 기초를 기른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교육과정은 ‘순응’의 교육과정이다. _ 네 번째 질문(교사는 왜 침묵하게 되었는가) 가운데
교실은 조용하고, 수업은 매끄럽게 흘러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이 교실이 잃고 있는 것이다. (...) 침묵은 문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다룰 기회를 없앤다. 갈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갈등을 다루는 법을 배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린이는 자기 목소리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경험을 해본 적 없이 자란다. 자기 목소리가 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좀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_ 네 번째 질문(교사는 왜 침묵하게 되었는가) 가운데
한국 민주주의를 끝까지 지켜낸 사람들이 학교에서 시민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학교 교육에도 ‘불구하고’ 시민이 된 사람들이다. 침묵을 가르치는 교실에도 불구하고, 순응을 새기는 숨겨진 교육과정에도 불구하고, 시민교육 없이도 시민이 된 사람들.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이면서 동시에 위험이다. 위기의 순간에는 분출하지만 일상의 토양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촛불은 켜지지만 교실은 침묵한다. 비상계엄은 여섯 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그러나 교실의 침묵은 60년이 넘도록 깨지지 않고 있다._네 번째 질문(교사는 왜 침묵하게 되었는가) 가운데
「헌법」 제7조 제2항은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정하고 있다. 보장은 권리의 말이다. ‘권리를 보장한다’는 말의 본래 의미는 정치권력이 교사를 자기 도구로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학교장이나 정권이 교사에게 특정 정치적 입장을 강요하지 못하게 막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말은 정반대로 쓰여왔다. 권력으로부터 교사를 보호해야 할 헌법이 거꾸로 권력으로 하여금 교사의 시민적 자유를 봉쇄할 수 있게 하는 방편이 된 것이다. _ 다섯 번째 질문(교육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왜 부정하는가) 가운데
배려가 한 사람의 마음에 머문다면 돌봄은 개인을 넘어 사회의 구조를 보게 한다. 배려가 개인의 태도에서 답을 찾는다면 돌봄은 사회의 구조에서 답을 찾는다. 배려가 ‘착한 아이’를 길러낸다면 돌봄은 ‘응답하는 시민’을 길러낸다. 한 사회가 아이에게 배려만 가르치면 아이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으로 자란다. 한 사회가 아이에게 돌봄을 가르치면 아이는 약함과 강함이 어떻게 나뉘어왔는가를 묻는 사람으로 자란다. 다음 시민교육이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배려가 아니라 돌봄에 더 가깝다. _ 여섯 번째 질문(돌봄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가운데
지금 여섯 살인 아이는 2056년에 서른여섯이 된다. 그때의 기후가 어떨지, 그때의 기술이 무엇일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그 시대를 살아갈 사람이 자기 삶에 관한 결정에 참여해본 사람인가 아닌가. 교실의 민주주의는 미래를 위한 대비가 아니라, 그 미래를 살아갈 시민의 몫을 지금 돌려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한 아이의 하루에서 시작된다. _ 일곱 번째 질문(인공지능과 기후위기의 시대, 교실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가운데